교회 전례력을 보면, 토요일에 특별한 축일이 없을 경우 주로 성모신심미사로 봉헌된다. 그렇다면 왜 토요일에 우리는 성모신심미사를 드리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금요일에 돌아가셨다. 제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고 따랐지만, 볼품없고 초라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더 이상 그들에게 그들이 믿던 구세주가 아니었다. 그분과 가까이 있던 사람들에게조차 이제 그분은 그저 훌륭하신 선생님이며, 예언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오로지 성모님만은 그분의 신성을 믿고 또 지키셨다. 그러기에 토요일의 의미는 우리들에게 중요하다.
이것은 마치 현재 우리의 사회현상과도 같다. 마치 세상은 토요일과 같다. 많은 이들이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라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재미와 세상의 가치를 쫓아 살아가며 예수님을 떠나있을 때, 우리는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그분의 신성을 믿고 또 지키는 것이다. 성모님과 함께, 그리고 성모님처럼…
얼마 전 나는 미국에 갔을 때, 한 공항에서 벤치에 앉아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억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이 그저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외국에서 급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생각에 아마도 그 같은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그들은 그저 세상의 가치로 그들의 일을 하고, 생각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보였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분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때 나는 이 벤치에 앉아 기도를 하며 홀로 주님의 신성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 주위와 많은 사람들을 내 기도를 통해 축성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든, 누구든 그분의 신성을 세상 한복판에서 지켜드릴 수 있으며, 또 내 주변을 축성할 수 있다. 우리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기도를 드린다거나, 하루를 살아가면서 일상 중에 그분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세상 한복판에서,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잊고 세상의 가치로 살아갈 때, 그분의 신성을 지켜드리고 또 내 주변을 축성하는 것이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세속적인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세상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세상일을 처리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 한복판에서 그분의 신성을 지키고 또 그분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내 일상 안에 살아계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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