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김대건 신부님을 1번으로 지금까지 한국 천주교회에서 수품을 받은 사제 목록이 발간되었다. 2005년 9월까지 4387명의 한국인 사제가 수품을 받았고, 나는 3804번째였다. 그리고 최근 3년 사이에 500명이 넘는 사제가 수품을 받았다. 1989년 한해 수품 받은 사제가 처음 100명이 넘었고, 2004년에는 186명이 수품을 받았다. 하지만 1945년 해방까지 한국인 사제는 1845년 수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님을 포함하여 모두 197분에 지나지 않았다.
옛날에는 장남이 자손이 없으면 차남의 큰아들을 장남 호적에 올리곤 하였는데, 해서 호적상으로는 내 증조할아버님이 신부님이시다. 증조할아버님은 우리나라 15번째 사제(손성재 야고버)로서 1927년에 돌아가시어 현재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셨다. 공소회장님의 큰아들로 일찍부터 성직자의 길을 걸으셨던 신부님은 양아들인 내 할아버지를 데려다 교육을 시키셨다. 따라서 내 할아버지 역시 일찍부터 수도자의 길을 가고자 20세 때 프란치스꼬회에 입회를 하려 했지만 당시 병을 앓으시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해서 할아버지께서는 내 아버지를 신학교에 보내 성직자의 길을 가게 하셨지만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시다가 손자인 내가 그 길을 가게 되었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내 할아버지나 내 아버지 중 어느 한분이 성직자의 길을 가셨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무(無)’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 나를 있게 하시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자리가 하느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는 시간과 장소이기에 나를 있게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하느님 입장에서 ‘나’라는 존재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아닐까?* 그것도 내 헤아리지 못하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불평과 불만 속에 살아왔고 또 욕망하고 교만했는가를 생각해 본다. 지금 내게 맡겨진 일들 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내 지나온 삶과 지금의 모든 상황에 있어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획 하에 ‘나’라는 존재가 꼭 있어야할 ‘필연적인’ 이유를 가지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내 상황이 나를 필요로 하고, 꼭 ‘나’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이나 일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 모두가 좋은 몫이면 좋겠지만 처음부터 내 몫이 아니었으면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때론 내게 주어진 역할이 너무나도 힘들어 “왜 내게는 이런 힘든 일이 주어진 것일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 입장에서 보신다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상황에서 ‘나’이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에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 ‘나’를 있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꼭 ‘나’일 수밖에 없는 ‘필연’인 것이다.
* 물론 철학적으로 ‘우연’과 ‘필연’에 대해 언급한다면 논할 것이 많지만 여기서는 단순한 일상용어로 사용하였다.
옛날에는 장남이 자손이 없으면 차남의 큰아들을 장남 호적에 올리곤 하였는데, 해서 호적상으로는 내 증조할아버님이 신부님이시다. 증조할아버님은 우리나라 15번째 사제(손성재 야고버)로서 1927년에 돌아가시어 현재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셨다. 공소회장님의 큰아들로 일찍부터 성직자의 길을 걸으셨던 신부님은 양아들인 내 할아버지를 데려다 교육을 시키셨다. 따라서 내 할아버지 역시 일찍부터 수도자의 길을 가고자 20세 때 프란치스꼬회에 입회를 하려 했지만 당시 병을 앓으시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해서 할아버지께서는 내 아버지를 신학교에 보내 성직자의 길을 가게 하셨지만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시다가 손자인 내가 그 길을 가게 되었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내 할아버지나 내 아버지 중 어느 한분이 성직자의 길을 가셨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무(無)’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 나를 있게 하시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자리가 하느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는 시간과 장소이기에 나를 있게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하느님 입장에서 ‘나’라는 존재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아닐까?* 그것도 내 헤아리지 못하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불평과 불만 속에 살아왔고 또 욕망하고 교만했는가를 생각해 본다. 지금 내게 맡겨진 일들 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내 지나온 삶과 지금의 모든 상황에 있어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획 하에 ‘나’라는 존재가 꼭 있어야할 ‘필연적인’ 이유를 가지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내 상황이 나를 필요로 하고, 꼭 ‘나’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이나 일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 모두가 좋은 몫이면 좋겠지만 처음부터 내 몫이 아니었으면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때론 내게 주어진 역할이 너무나도 힘들어 “왜 내게는 이런 힘든 일이 주어진 것일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 입장에서 보신다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상황에서 ‘나’이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에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 ‘나’를 있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꼭 ‘나’일 수밖에 없는 ‘필연’인 것이다.
* 물론 철학적으로 ‘우연’과 ‘필연’에 대해 언급한다면 논할 것이 많지만 여기서는 단순한 일상용어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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