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누군가를 몹시 사랑하게 되면 가슴이 저림을 느낀다. 더욱이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 때는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다. “내 마음이 이렇다. 나의 이 애절한 마음을 알아다오.” 그래서 예수성심상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심장을 밖으로 내어 놓으신 것이다.
당신의 심장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이 성화는 18세기 바토니 폼페오(Girolamo Pompeo Batoni, 1708-1787)의 작품으로, 이냐시오 성인의 집무실과 무덤이 있는 로마 예수성당 내 예수성심 경당에 모셔져 있다. 이는 예수회가 예수성심 전파에 헌신하겠다는 의미로 봉헌된 것이다. 예수성심은 1675년 ‘성모 마리아 방문 봉쇄 수녀회’ 소속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성녀께 발현하셨는데, 당시 성녀의 영적 지도신부가 예수회의 콜롱비에르 신부였다. 이에 예수성심 신심은 예수회 사제들에 의해 전 세계 교회로 전해지게 되었고 첫 목요일 성시간 전례, 첫 금요일 예수성심 신심미사, 예수성심대축일 등이 있게 되었다. 오늘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개념은 일반화되어 누구나 이야기하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무섭고 두려운 심판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발현하시어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랑 가득한 사람이다”라며 당신의 성심을 드러내셨다. 왜곡된 하느님의 이미지는 예수성심 발현 이후 점차 교회 내에서 제자리를 되찾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결국 예수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예수성심을 오래된 신심으로 간주하여 그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도교를 논하는데 있어 어찌 예수님의 마음을 배제하고 그리스도교를 논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우리는 교리 시간에 교회의 모든 성사가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에서 흘러나왔다고 배웠다. 예수성심, 예수님의 마음, 그분의 연민어린 사랑으로부터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성심은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여정이요, 목적이다. ‘예수성심’은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내어주신 것이며, ‘성모성심’은 인간의 사랑을 하느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다.(가톨릭대사전 참조) 따라서 동전 앞뒷면처럼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은 반드시 함께하여야 한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 9장에서도,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 어느 정도 쓸모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보려면 그가 예수성심께 얼마나 가까이 일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고 예수성심을 강조하며, 각 가정에 예수성심상 모시기, 예수성심께 각 가정을 봉헌하기 등을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같은 따뜻한 심장을 가진 한 사람으로 우리를 만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유대교인 그리고 이슬람교인과 구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분의 마음을 만나야 한다. 그분과 인간적인 감정의 교류가 있어야 한다. 예수성심과의 만남은 이렇듯 바로 그분과의 인격적 사랑을 의미한다. 사실 사람들 관계에서도 아무런 인격적 관계가 없는 피상적인 만남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냥 아는 사람’과 ‘인격적 관계가 있는 사람’이 있다. 물론 인격적 관계에서도 그 깊이가 사람마다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성심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하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는 것은 단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도덕규범을 알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위함이다.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그분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체험이다. 마음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성심과의 만남이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분 사랑 안에 머물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으며, 일상 삶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4-5) 따라서 우리는 열매를 청할 것이 아니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를 청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나와의 인격적 관계이다.
예수회 제28대 총장이었던 아루페 신부님은 임종 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여러분들이 제게 조언을 원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예수회에서 54년을 살았고, 총장으로 16년 가까이 살면서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그 힘을 스스로 발견해야 합니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예수성심의 사랑 안에 깊이 잠기어,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각자의 삶에서 예수성심의 신심으로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회의 ‘기도의 사도직’은 예수성심의 삶을 일상에서 살아가는 영성으로, 매일 자신의 삶을 예수성심께 봉헌하고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홈페이지 http://pwpnap.jesuit.kr/ 참조)
'영성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떻게 우리는 참된 회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0) | 2012.04.14 |
---|---|
'주님께 나를 봉헌한다'는 의미 (0) | 2012.04.08 |
초자연적 현상에 관한 영의 식별 (0) | 2012.04.08 |
예수님은 내 마음 안에서 죽으셨다 (0) | 2012.04.08 |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왜 우리의 구원을 위함인가? (0) | 2012.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