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함께 빵을 나누었던 그 의미 깊은
‘행위’는 ‘의식(儀式)’이 아니라 본래 형제적 식사였다. 하느님께서는 식사와 같은 인간의 일상적인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우리들이 상호 통교하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빵과 포도주 보다는 예수께서 함께 식사하시며 형제들과 함께 나누었던 그 모습에서 우리는
참된 성찬례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성찬례는 무엇보다도 함께 나누는 식사로써 ‘먹는 행위’보다는 ‘형제적 통교’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과 그리스도와 함께 음식을 나누는 2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트렌트 공의회는 실제적 현존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먹고 마시는 행위”를 잊게 만들었다. 또한 얀세니즘은 “먹고 마심”보다는 “축성된 성체를 흠숭”하는 신심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성체성사의 참 ‘표지’는 제사 음식을 축성하고 나누어 먹는 회중에 있는 것이지, 음식 자체에만 있다고 할 수 없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사는 삶과 동떨어진 ‘예식’이 아니었으며 형제적 친교의 식사였다. 당시 성찬례의 이름도 미사가 아니라 “빵을 나눔”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에서 우리에게 가까운 상징들을 사용하여 세우셨다. 따라서 이 성사는 의식으로만 우리에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우리의 삶 자체가 성체성사의 삶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희생되신 예수와 한 몸을 이룬 우리가 모든 이들과 함께 빵과 포도주로 대표되는 음식물과 그밖에 우리를 있게 하는 모든 것들을 서로 나누도록 바로 이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이다. 바울로는 “이것은 더 이상 성찬례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갈라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통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축성된 빵을 나누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용서와 나눔의 행위인 것이다. 나누지 않는다는 것은 성사의 정신과 반대되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여라”고 하시는 계명은 매 성찬례에 참여하는 이들이 구체적으로 생활 안에서 실현해야 되는 계명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죽어 가시면서 성부와 세상을 위해 단 하나의 참된 빠스카 어린양의 몸과 피를 바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사는 의식적 차원이 아니라 사랑의 차원에서 존재한다. “버림받은 감실”은 영성체를 하면서도 일치와 자아의 포기라는 구체적 행위를 하는 신자가 그 공동체 안에 아무도 없을 때, 그 공동체의 감실을 그렇게 부른다. 따라서 성찬례의 중요한 의미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우리 마음과 우리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인 우리 일상의 삶 안에서 서로 함께 서로를 나누며 용서와 일치를 이루고 다른 이를 위해 나를 내어주는 삶 즉 공동체적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행위가 없이 ‘의식’ 자체에 머문다던가 성체신심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체성사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참된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오늘 하루 성체성사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 보자.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사는 삶과 동떨어진 ‘예식’이 아니었으며 형제적 친교의 식사였다. 당시 성찬례의 이름도 미사가 아니라 “빵을 나눔”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에서 우리에게 가까운 상징들을 사용하여 세우셨다. 따라서 이 성사는 의식으로만 우리에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우리의 삶 자체가 성체성사의 삶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희생되신 예수와 한 몸을 이룬 우리가 모든 이들과 함께 빵과 포도주로 대표되는 음식물과 그밖에 우리를 있게 하는 모든 것들을 서로 나누도록 바로 이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이다. 바울로는 “이것은 더 이상 성찬례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갈라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통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축성된 빵을 나누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용서와 나눔의 행위인 것이다. 나누지 않는다는 것은 성사의 정신과 반대되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여라”고 하시는 계명은 매 성찬례에 참여하는 이들이 구체적으로 생활 안에서 실현해야 되는 계명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죽어 가시면서 성부와 세상을 위해 단 하나의 참된 빠스카 어린양의 몸과 피를 바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사는 의식적 차원이 아니라 사랑의 차원에서 존재한다. “버림받은 감실”은 영성체를 하면서도 일치와 자아의 포기라는 구체적 행위를 하는 신자가 그 공동체 안에 아무도 없을 때, 그 공동체의 감실을 그렇게 부른다. 따라서 성찬례의 중요한 의미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우리 마음과 우리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인 우리 일상의 삶 안에서 서로 함께 서로를 나누며 용서와 일치를 이루고 다른 이를 위해 나를 내어주는 삶 즉 공동체적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행위가 없이 ‘의식’ 자체에 머문다던가 성체신심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체성사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참된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오늘 하루 성체성사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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