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육체와 영혼 그리고 정신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육체를 지니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리고 육체의
감각에 익숙해 있는 우리로서는 육체에 대해 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물질적인 존재일 뿐만이 아니라,
생각하고 감정을 갖고 있는 존재 그리고 그것은 육체와는 다른 그 어떤 영역이라는 것 또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영혼은 무엇이고 또
정신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크게 분류하여 생각하곤 한다. 따라서 우리 안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나 감정을 육체가 아닌
영혼의 분류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영역을 정신과 영혼으로 세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정신은 무엇일까? 그것은
육체를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서 육체를 통해 일어나게 되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 따위를 말한다. 즉 우리의 생각 중에 보다 육체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정신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정신은 보다 물질적인 의미에서 전 우주의 법칙과도 같은 자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모두 영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생각을 모두 순수 비물질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생각 중에는 물질성을 지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며 그것이 곧 정신이다. 이것은 전 우주를 구성하고는 있는 물질과도 상통하는 자연법칙의 일부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육체를 통해 오는 감정과 생각들 또는 조건반사 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호르몬의 분비에 의해 우리는 즐거운 감정 또는 슬픈 감정 등을 느끼기도 하며, 또한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을 통해 어떤 호르몬의 분비를 촉발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한 물질이 우리의 감정 또는 생각이 되고 또 우리의 생각이 어떤 물질이 되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오른 손을 위로 올린다는 생각을 해보자. 그 생각은 나의 뇌 세포를 자극하여 전기적 신호와 화학적 성분을 만들어 즉 물질로 바뀌어 신경망을 통해 오른 손 근육에 물질로서 전달될 것이고 결국 생각은 손을 위로 올리는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의 생각 그 자체가 근육의 운동이라는 물질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우리의 순수한 생각이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질로 변하게 되었을까? 따라서 나는 이러한 것들을 정신이라 부르며 그 정신은 언제이든 육체의 운동으로 나타나고 또 육체는 우리의 정신을 만든다. 즉 정신과 육체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하나 되어 우리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얼마든지 들 수가 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본다면(물질의 정보가 우리에게 입력된다) 뇌세포 속에 그 음식은 “맛있다”라는 기억이 되살아나(물질화 되어 기억된 정보가 우리 정신의 場으로 나와 비물질화 된다) 우리의 생각은 침샘을 자극한다(생각이 다시 물질화 된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정신과 육체의 조직화된 관계를 볼 수가 있다. 또한 우리가 기쁠 때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고(즉 우리의 생각이 물질을 만든다) 그리고 역으로 엔돌핀의 분비가 우리의 기쁜 감정도 만든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뇌중에는 감정을 컨트롤하는 뇌가 있다. 언젠가 포악하기로 이름난 한 열차 기관사가 사고로 감정을 컨트롤하는 뇌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 기관사는 아주 온화한 사람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그 기관사는 누구인가? 포악하였던 기관사가 그인가 아니면 지금의 온화한 기관사가 그인가? 우리는 그를 누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결국 그동안의 그의 괴팍한 성격은 감정을 컨트롤하는 뇌의 구조상 야기된 성격이었던 것이다. 성에 대한 욕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외부 자극에 의해 성적인 욕망이 생겨 내 안에 어떤 호르몬을 분비할 수도 있지만, 자연적인 신체의 리듬 때문에 아무런 자극 없이도 호르몬 분비에 의해 성적인 욕망이 생길 수도 있다. 마약으로 쾌락을 느끼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의 그 쾌락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마약이라는 물질이 우리의 육체를 자극하여 갖게 되는 쾌락이며 결국 이는 물질 또는 육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정신장애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들 고유의 순수한 영혼성은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어떤 세포나 호르몬에 의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좌우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모든 생각은 결코 영혼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이나 감정들은 우리의 육체(물질)로부터 오게 된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우리는 육체도 잃지만 육체로 인해 갖게 되는 모든 생각과 감정들 또한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죽은 후에는 식욕도 성욕도 갖지 않는 순수 영혼의 상태에 머물게 되며, 생전에 영혼과 물질의 관계를 통해 갖게 된 정신의 역사가 우리 영혼에 흔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氣 수련은 이 같은 우리의 정신을 수련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육체와 정신을 조화롭게 다스림으로 해서, 우리는 맑은 정신과 건강한 육체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은 우리의 육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물질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온 우주의 법칙 즉 이 현상계의 모든 자연의 법칙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정신은 온 우주를 감싸고 있는 기운과 법칙의 동일 선상 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 자연과 일치를 이룰 때 우리의 몸과 정신 또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건강한 모습으로 지낼 수 있다. 이들은 이러한 정신과 육체의 즉 정신과 물질의 신비스러운 조합을 통해 인간과 전 우주의 존재를 하나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같이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어 건전한 사고방식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선(善)이신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며 사랑이신 하느님의 창조물이기에 본질적으로 선(善)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과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 되어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사랑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이며, 진리 그 자체와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불교의 선(禪) 수행 역시 이러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의 육체를 다스리고 우리의 정신을 다스리어 온 우주와 하나 되어, 선(善)과 사랑 그 자체인 자연과 하나 되어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진리인 그 자체와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는 참된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를 것이며 참된 진리를 깨우치고 터득하게 될 것이다.
반면 영혼은 비물질성의 존재 양식으로 모든 물질이 배제된 순수 비물질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인간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 양심의 근원이며 또한 우리가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영역이다. 이것은 보다 우리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하느님으로 부터 받은 생명의 기운으로 매우 인격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신을 통해 진리와 하나 되어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우리 인간은 오로지 영혼의 영역에서만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고 친교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 또한 이러한 영혼의 영역에서 오게 되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은 우리 안에서 매우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하나가 되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라고 볼 수 있으며 상호 매우 밀접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육체의 행위는 곧 우리의 정신에 미치고 또 우리 영혼에 미친다. 반대로 영혼의 음성 또한 우리 정신과 우리 육체에 미친다. 일반적으로 이것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균형 잡혀 있을 때 우리는 건전한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균형이 흐트러질 때 우리 또한 균형 잡히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육체를 통한 정신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영혼에서 오는 생각인가를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생각이 참된 나의 영혼의 음성이라고 할 수 없다. 눈의 착시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우리의 생각처럼 우리의 생각 중에는 육체의 한계로 인해 갖게 되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부질없고 헛된 망상에 사로 잡혀 그것을 절대시하며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잘 분별할 때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생각들을 내 안에서 잘 슬기롭게 다스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것들 중 어느 것이 참된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른 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정신과 생각은 우리의 육체를 만들고,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정신과 생각을 만든다. 우리가 육을 통해 만족을 느끼는 것은 육에서 오는 우리의 정신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물질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영혼의 기쁨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측면을 갖고 있다. 또한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이 꿈속에서 재현되는 것은 이미 그 것이 내 뇌 안에 자료화 되어 저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그 생각이 이미 내 육체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만일 그것이 나쁜 기억이라면 그 기억은 계속해서 우리의 육체에 그리고 정신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건전하고 맑은 생각을 갖기 위해서는 육체적 운동도 필요하고, 정신적인 운동도 필요하며 아울러 영혼의 운동 또한 필요하다. 이 영혼의 운동을 우리는 영신수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는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건강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정신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정신은 보다 물질적인 의미에서 전 우주의 법칙과도 같은 자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모두 영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생각을 모두 순수 비물질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생각 중에는 물질성을 지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며 그것이 곧 정신이다. 이것은 전 우주를 구성하고는 있는 물질과도 상통하는 자연법칙의 일부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육체를 통해 오는 감정과 생각들 또는 조건반사 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호르몬의 분비에 의해 우리는 즐거운 감정 또는 슬픈 감정 등을 느끼기도 하며, 또한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을 통해 어떤 호르몬의 분비를 촉발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한 물질이 우리의 감정 또는 생각이 되고 또 우리의 생각이 어떤 물질이 되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현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오른 손을 위로 올린다는 생각을 해보자. 그 생각은 나의 뇌 세포를 자극하여 전기적 신호와 화학적 성분을 만들어 즉 물질로 바뀌어 신경망을 통해 오른 손 근육에 물질로서 전달될 것이고 결국 생각은 손을 위로 올리는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의 생각 그 자체가 근육의 운동이라는 물질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우리의 순수한 생각이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질로 변하게 되었을까? 따라서 나는 이러한 것들을 정신이라 부르며 그 정신은 언제이든 육체의 운동으로 나타나고 또 육체는 우리의 정신을 만든다. 즉 정신과 육체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하나 되어 우리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얼마든지 들 수가 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본다면(물질의 정보가 우리에게 입력된다) 뇌세포 속에 그 음식은 “맛있다”라는 기억이 되살아나(물질화 되어 기억된 정보가 우리 정신의 場으로 나와 비물질화 된다) 우리의 생각은 침샘을 자극한다(생각이 다시 물질화 된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정신과 육체의 조직화된 관계를 볼 수가 있다. 또한 우리가 기쁠 때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고(즉 우리의 생각이 물질을 만든다) 그리고 역으로 엔돌핀의 분비가 우리의 기쁜 감정도 만든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뇌중에는 감정을 컨트롤하는 뇌가 있다. 언젠가 포악하기로 이름난 한 열차 기관사가 사고로 감정을 컨트롤하는 뇌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 기관사는 아주 온화한 사람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그 기관사는 누구인가? 포악하였던 기관사가 그인가 아니면 지금의 온화한 기관사가 그인가? 우리는 그를 누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결국 그동안의 그의 괴팍한 성격은 감정을 컨트롤하는 뇌의 구조상 야기된 성격이었던 것이다. 성에 대한 욕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외부 자극에 의해 성적인 욕망이 생겨 내 안에 어떤 호르몬을 분비할 수도 있지만, 자연적인 신체의 리듬 때문에 아무런 자극 없이도 호르몬 분비에 의해 성적인 욕망이 생길 수도 있다. 마약으로 쾌락을 느끼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의 그 쾌락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마약이라는 물질이 우리의 육체를 자극하여 갖게 되는 쾌락이며 결국 이는 물질 또는 육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정신장애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그들 고유의 순수한 영혼성은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어떤 세포나 호르몬에 의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좌우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모든 생각은 결코 영혼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이나 감정들은 우리의 육체(물질)로부터 오게 된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우리는 육체도 잃지만 육체로 인해 갖게 되는 모든 생각과 감정들 또한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죽은 후에는 식욕도 성욕도 갖지 않는 순수 영혼의 상태에 머물게 되며, 생전에 영혼과 물질의 관계를 통해 갖게 된 정신의 역사가 우리 영혼에 흔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氣 수련은 이 같은 우리의 정신을 수련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육체와 정신을 조화롭게 다스림으로 해서, 우리는 맑은 정신과 건강한 육체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은 우리의 육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물질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온 우주의 법칙 즉 이 현상계의 모든 자연의 법칙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정신은 온 우주를 감싸고 있는 기운과 법칙의 동일 선상 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 자연과 일치를 이룰 때 우리의 몸과 정신 또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건강한 모습으로 지낼 수 있다. 이들은 이러한 정신과 육체의 즉 정신과 물질의 신비스러운 조합을 통해 인간과 전 우주의 존재를 하나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같이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어 건전한 사고방식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선(善)이신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며 사랑이신 하느님의 창조물이기에 본질적으로 선(善)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과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 되어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사랑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이며, 진리 그 자체와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불교의 선(禪) 수행 역시 이러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의 육체를 다스리고 우리의 정신을 다스리어 온 우주와 하나 되어, 선(善)과 사랑 그 자체인 자연과 하나 되어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진리인 그 자체와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는 참된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를 것이며 참된 진리를 깨우치고 터득하게 될 것이다.
반면 영혼은 비물질성의 존재 양식으로 모든 물질이 배제된 순수 비물질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인간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 양심의 근원이며 또한 우리가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영역이다. 이것은 보다 우리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하느님으로 부터 받은 생명의 기운으로 매우 인격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신을 통해 진리와 하나 되어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우리 인간은 오로지 영혼의 영역에서만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고 친교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 또한 이러한 영혼의 영역에서 오게 되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은 우리 안에서 매우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하나가 되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라고 볼 수 있으며 상호 매우 밀접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육체의 행위는 곧 우리의 정신에 미치고 또 우리 영혼에 미친다. 반대로 영혼의 음성 또한 우리 정신과 우리 육체에 미친다. 일반적으로 이것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균형 잡혀 있을 때 우리는 건전한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균형이 흐트러질 때 우리 또한 균형 잡히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육체를 통한 정신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영혼에서 오는 생각인가를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생각이 참된 나의 영혼의 음성이라고 할 수 없다. 눈의 착시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우리의 생각처럼 우리의 생각 중에는 육체의 한계로 인해 갖게 되는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부질없고 헛된 망상에 사로 잡혀 그것을 절대시하며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잘 분별할 때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생각들을 내 안에서 잘 슬기롭게 다스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것들 중 어느 것이 참된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른 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정신과 생각은 우리의 육체를 만들고,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정신과 생각을 만든다. 우리가 육을 통해 만족을 느끼는 것은 육에서 오는 우리의 정신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물질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영혼의 기쁨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측면을 갖고 있다. 또한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이 꿈속에서 재현되는 것은 이미 그 것이 내 뇌 안에 자료화 되어 저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그 생각이 이미 내 육체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만일 그것이 나쁜 기억이라면 그 기억은 계속해서 우리의 육체에 그리고 정신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건전하고 맑은 생각을 갖기 위해서는 육체적 운동도 필요하고, 정신적인 운동도 필요하며 아울러 영혼의 운동 또한 필요하다. 이 영혼의 운동을 우리는 영신수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는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건강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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