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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자료

평범한 일상의 가치

by 손우배 2006. 11. 3.
얼마 전 로마에서 오신 분을 포함하여 11개국이 참여하는 ‘기도의 사도직’ 동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담당자 회의가 서울에서 있었다. 국제회의였지만 거의 혼자 주관을 하여야 했기에 회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체적인 진행과 회의 진행에 따른 잡일들을 모두 했어야 했다.

공항에서 회의장까지 안내, 회의장 준비, 자료 복사, 필기구 구매, 간식 구매, 이름표 제작, 안내문 만들기, 식사메뉴 확인, 시내관광, 출국준비, 공항까지 차량 운행 등 회의 진행에 따른 전반적인 일들은 물론 한국 대표로서 발표도 하고 회의 진행에 따라 일어나는 상황들에 대처하기 위해 나는 일주일 내내 긴장을 하며 지내야 했다.

물론 많이 힘들었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이 회의를 잘 준비하여, 사람들이 원만한 회의를 하고 또 회의를 통해 좋은 결과를 얻어 본국으로 돌아가 보다 이 사도직에 잘 봉사할 수 있다면, 분명 내가 회의 준비를 잘하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회의를 잘 준비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매우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의 것들이었다. 간식준비를 위해 마트에 가서 과자와 사탕을 사고, 회의 진행을 위해 문방구에 가서 사무용품을 사고, 자료를 복사하고, 이름표를 만들기 위해 가위질을 하고, 회의장 의자를 옮기고, 공항까지 왕복 2시간여 운전을 하고, 시내 관광을 위해 여행사와 연락하여 가격 흥정을 하고, 또 어떤 때는 시내 관광을 하는 분들을 기다리기 위해 인사동 광장에서 1시간여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이 회의를 잘 진행되기 위해 내가 했던 일들이고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이 결국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물론 회의에서 좋은 내용을 발표하고 좋은 토론을 하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이겠지만, 회의 준비를 위해 했던 모든 잡일들 역시 이 회의 진행을 잘하기 위한 것이니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영광임에 틀림없었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내가 회의를 준비하며, 회의 그 자체만 생각했다면 그저 일이었을 것이며, 마트에서 과자와 사탕을 사는 일 자체만 생각하였다면 짜증이 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 번은 수도회 내 장례식이 있었다. 나는 수도회 내에서 행정을 맡고 있기에, 처음으로 접하는 장례식을 잘 준비하기 위해 이전 자료들을 찾아, 흰 장갑은 언제 몇 개가 필요하고, 꽃은 어느 집에서 구매하고, 장지에서 식사는 어디서하고, 차량은 어떻게 준비하는 등을 줄을 쳐가며 보고 있었다. 그 때 한 신부님이 “뭐, 해요?”하고 물어, 나는 농담으로 “장례식 준비를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신부님께서는 “아니, 그런 걸 공부해요?”라고 물었다. 순간 나도 “어, 내가 수도원에 와서 왜 이런 것을 하지?”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직장 다니며 했던 업무와 지금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수도원에 들어왔는가? 이런 시간에 영적독서를 하거나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한 번은 각 공동체에서 결산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일주일 내내 각 공동체 결산 양식을 엑셀로 처리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었다. 물론 이를 통해 각 공동체에서는 매월 보다 쉽게 결산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엑셀이나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하며 일상적인 업무를 하기위해 여기 왔는가?”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엑셀 안에 계신 하느님을 찾아보자. 분명 그곳에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실 것이다. 그분은 하늘과 땅 그리고 온 세상을 만드신 분이시다. 단지 내가 그 길을 못 찾았을 뿐이다.”라고…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지향점이 있다. 그 지향이 하느님의 영광을 향하고 있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영광인 것이다. 하다못해 길을 걷고 있는 것조차 하느님의 영광일 수 있다. 그 걸음걸이에 지향이 함께 한다면… 우리의 행동이 보편적 사랑의 실천이라면, 우리의 행동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일 것이다. 아이들 위해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하는 것, 집안을 청소하는 것, 바느질하는 것, 공부하는 것, 운전하는 것 등 우리 삶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일 수 있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자체가 하느님께 영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생활 이전의 나자렛 예수님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20대 후반이면 이미 청년인데, 어찌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집안일이나 하고 목수 일을 하시면서 나무나 깎고 다듬고 계실까? 그 시간에 나가 병자를 고치시고 복음 전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저 집안 청소를 하고 부모님께 순명하며 평범한 일상의 일들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의 일상이 얼마나 하느님께 큰 영광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기에, 우리에게 일상의 소중함과 가치를 몸소 보여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일상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 30년을 결코 간과해서 안 된다. 그 안에 우리 평신도들이 평범한 일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이 있다.

우리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어떤 대단한 사랑을 실천하거나 남들이 하지 못하는 대단한 선행과 희생을 했을 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의 평범한 일들이 모두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다. 즉, 그저 평범한 일상의 것들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이 세상 어느 성인도 일상을 살아가지 않은 성인은 없다. 내가 이 회의를 준비하며, 과자를 사고, 운전을 하고, 복사를 하고, 사람을 기다리는 모든 것의 지향은 분명 하느님의 영광이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 행동의 마지막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한다. 이러한 것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늘 자신을 제3자의 관점에서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 안에는 그 같은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금은보화가 가득 묻혀있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때는 그저 묻혀 있는 체로 지나치겠지만, 그것을 의식할 때 우리는 오늘 하루 내 일상 삶 속에 있는 보석들을 하나 가득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