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영성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여러 곳에서 般若 智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에 짧게나마 논하고자 한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참된 인식을 얻기 위해 般若의 智를 득(得)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般若의 智란 무엇인가? 般若의 智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유구조인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벗어난 직관에 의한 인식이다. 일반적인 우리의 사유구조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된 그리고 내가 무엇을 인식한다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에 의존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사유구조는 단지 제한되고 상대적인 개념으로 존재를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사유형식으로 주관과 객관이라는 분별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주관에 의해 분별되고 판단되어지는 존재는 참된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논리를 존재에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논리는 단지 우리 인간의 사유 형식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우리의 사유구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률․모순률․배중율(동일률은 "A는 A이다.", 모순율은 "A는 B임과 동시에 B가 아니라고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배중률은 "A는 B가 아니며 또 B가 아닌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이라는 원칙에 따른다. 즉, "A는 B이면서 A는 B가 아니다"라는 논리는 전통 서양철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며, 有無도 아니고, 非有非無도 아니다."라는 4구부정(4句否定)은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사유구조를 초월한 ‘비논리의 논리’를 의미하며, 이러한 ‘비논리의 논리’는 직관에 의해 파악되어 지는 것이다. 불교의 경전에는 “거대한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고, 조그마한 겨자씨가 수미산에 들어가는 지혜를 얻을 때 우리는 비로소 道를 깨닫는다”고 한다. 어떻게 그 커다란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고 또 그러한 겨자씨가 수미산으로 들어 갈 수 있을까?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일반적인 사유형식을 뛰어 넘는 般若의 智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般若의 智를 얻게 될 때 비로소 “A는 B이면서 A는 B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사유구조에 따른 한계는 얼마든 발견할 수가 있다. 예로 우리는 절대무(絶對無)-“A가 없다, A가 있다”라는 상대무(相對無)가 아닌, 대상이 없는 절대무(絶對無)-를 사유할 수 없으며, 무한과 영원 즉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사유를 할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사유형식을 벗어나기 때문이며, 우리의 일반적 사유형식으로는 이러한 초월적 논리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직관적인 지혜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냐시오 성인은 1522년 까르도네르 강가에서 강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은혜와 그가 알고 있는 수많은 사실들을 다 모은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그가 받은 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설명으로도 그 체험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직관에 의해 터득된 지혜를 어떻게 글이나 말로 구체화시킬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의 한정된 언어나 글로 제한될 수 없는 그러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교회의 대 신학자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던 중에 큰 깨달음을 얻고 일평생 집필해 온 신학과 철학에 관한 서적들을 모두 태워버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깨달음 후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쓰레기처럼 보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지혜가 직관에 의해 얻어지는 지혜이며, 인간의 한정된 언어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진리인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道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더 이상 道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어찌 道를 인간의 한정된 말과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아마도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직관을 통해 얻은 것을 언어로 구체화하려 하지만 오히려 그 언어로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참된 직관의 세계는 우리의 한정된 말과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일반적인 사유 형식을 초월한 그러한 깨달음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참된 인식을 얻기 위해 般若의 智를 득(得)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般若의 智란 무엇인가? 般若의 智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유구조인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벗어난 직관에 의한 인식이다. 일반적인 우리의 사유구조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된 그리고 내가 무엇을 인식한다는 주관과 객관의 대립에 의존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사유구조는 단지 제한되고 상대적인 개념으로 존재를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사유형식으로 주관과 객관이라는 분별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주관에 의해 분별되고 판단되어지는 존재는 참된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논리를 존재에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논리는 단지 우리 인간의 사유 형식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우리의 사유구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률․모순률․배중율(동일률은 "A는 A이다.", 모순율은 "A는 B임과 동시에 B가 아니라고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배중률은 "A는 B가 아니며 또 B가 아닌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이라는 원칙에 따른다. 즉, "A는 B이면서 A는 B가 아니다"라는 논리는 전통 서양철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며, 有無도 아니고, 非有非無도 아니다."라는 4구부정(4句否定)은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사유구조를 초월한 ‘비논리의 논리’를 의미하며, 이러한 ‘비논리의 논리’는 직관에 의해 파악되어 지는 것이다. 불교의 경전에는 “거대한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고, 조그마한 겨자씨가 수미산에 들어가는 지혜를 얻을 때 우리는 비로소 道를 깨닫는다”고 한다. 어떻게 그 커다란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고 또 그러한 겨자씨가 수미산으로 들어 갈 수 있을까?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일반적인 사유형식을 뛰어 넘는 般若의 智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般若의 智를 얻게 될 때 비로소 “A는 B이면서 A는 B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사유구조에 따른 한계는 얼마든 발견할 수가 있다. 예로 우리는 절대무(絶對無)-“A가 없다, A가 있다”라는 상대무(相對無)가 아닌, 대상이 없는 절대무(絶對無)-를 사유할 수 없으며, 무한과 영원 즉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사유를 할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사유형식을 벗어나기 때문이며, 우리의 일반적 사유형식으로는 이러한 초월적 논리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직관적인 지혜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냐시오 성인은 1522년 까르도네르 강가에서 강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은혜와 그가 알고 있는 수많은 사실들을 다 모은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그가 받은 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설명으로도 그 체험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직관에 의해 터득된 지혜를 어떻게 글이나 말로 구체화시킬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의 한정된 언어나 글로 제한될 수 없는 그러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교회의 대 신학자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던 중에 큰 깨달음을 얻고 일평생 집필해 온 신학과 철학에 관한 서적들을 모두 태워버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깨달음 후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쓰레기처럼 보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지혜가 직관에 의해 얻어지는 지혜이며, 인간의 한정된 언어와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진리인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道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더 이상 道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어찌 道를 인간의 한정된 말과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아마도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직관을 통해 얻은 것을 언어로 구체화하려 하지만 오히려 그 언어로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참된 직관의 세계는 우리의 한정된 말과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일반적인 사유 형식을 초월한 그러한 깨달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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