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자료
"나약함의 영성"
손우배
2006. 1. 12. 22:35
오래전 같은 공동체의 몇몇 수사들이 단식을 하면서 미사 중에 자신들의 성찰과 단식을
통해 느낀 것들을 우리에게 나누어준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한 수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깊이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수사는 “우리는
기도를 통해 몸과 마음이 맑은 상태에서 하느님을 만나야만 한다”는 생각에, 단식과 기도를 통해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정화하는 작업을 계속하였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 정말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러한 모습이 아니라 울고 싶을 때 울고, 배고플 때는 또 자장면을 게걸스럽게
먹고, 짜증날 때는 짜증을 내고, 아름다움 앞에서 또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지극히 인간적인 우리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 수사는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실로 동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신(god)의 모습으로 하느님(God)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모습 그 자체를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시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울 때 사랑스럽다. 만일 어린아이가 너무 어른스럽게 행동하거나 말을 한다면 우린 징그럽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우리 인간 역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아닌 신(god)들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하느님 역시 거북하지 않으실까? 하느님 역시 우리들의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을 더 사랑하지 않으실까?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기뻐하고 화날 때는 화를 내는…
우리가 공경하는 성인들 역시 신(god)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이었다. 그 분들 역시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한 신(god)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았던 세상 한가운데의 사람들이었다. 성인들을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이나 신(god)과 같은 존재로 정의하는 것은 곤란하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자. 예수께서 왕으로 오셨을 때 서로 높은 자리 앉아 있게 해달라고 조르던 모습, 예수께서 가장 어려웠던 십자가의 수난 때 도망쳐버린 제자들, 전교 여행을 떠나면서 동료 발라바와 전교에 대해 심하게 논쟁을 하고 결국은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갔던 바오로… 모두 우리의 인간적인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 그렇듯 세상 한복판에서 사람들과 부대끼어 살아가는 그런 우리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으실까?
우리들이 신(god)처럼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기에 하느님은 우리를 더욱 사랑하지 않으실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렇듯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수없이 실패하고 좌절함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사랑에 신뢰하면서 다시 일어나 또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그러한 사람들을 '성인'이라고 한다. 우리가 단식이나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극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완벽한 신(god)으로서의 극기가 아니라 부족한 인간으로서의 극기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지 스스로를 완벽하게 만든 후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큰 죄인의 모습으로 있다하더라도 바로 그 모습 그대로 하느님께 다가가 치유를 받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치유해서 완벽한 모습을 갖춘 후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모습과 우리의 감정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주님께 다가가 보여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겸손이며,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회에서 흔히 예수회원들 스스로를 칭하는 “죄인이면서 주님의 벗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그것은 굳이 예수회원뿐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모두의 모습일 것이다.
실로 동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신(god)의 모습으로 하느님(God)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모습 그 자체를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시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울 때 사랑스럽다. 만일 어린아이가 너무 어른스럽게 행동하거나 말을 한다면 우린 징그럽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우리 인간 역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아닌 신(god)들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하느님 역시 거북하지 않으실까? 하느님 역시 우리들의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을 더 사랑하지 않으실까?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기뻐하고 화날 때는 화를 내는…
우리가 공경하는 성인들 역시 신(god)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이었다. 그 분들 역시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한 신(god)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았던 세상 한가운데의 사람들이었다. 성인들을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이나 신(god)과 같은 존재로 정의하는 것은 곤란하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자. 예수께서 왕으로 오셨을 때 서로 높은 자리 앉아 있게 해달라고 조르던 모습, 예수께서 가장 어려웠던 십자가의 수난 때 도망쳐버린 제자들, 전교 여행을 떠나면서 동료 발라바와 전교에 대해 심하게 논쟁을 하고 결국은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갔던 바오로… 모두 우리의 인간적인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 그렇듯 세상 한복판에서 사람들과 부대끼어 살아가는 그런 우리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으실까?
우리들이 신(god)처럼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기에 하느님은 우리를 더욱 사랑하지 않으실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렇듯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수없이 실패하고 좌절함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사랑에 신뢰하면서 다시 일어나 또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그러한 사람들을 '성인'이라고 한다. 우리가 단식이나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극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완벽한 신(god)으로서의 극기가 아니라 부족한 인간으로서의 극기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지 스스로를 완벽하게 만든 후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큰 죄인의 모습으로 있다하더라도 바로 그 모습 그대로 하느님께 다가가 치유를 받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치유해서 완벽한 모습을 갖춘 후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모습과 우리의 감정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주님께 다가가 보여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겸손이며,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회에서 흔히 예수회원들 스스로를 칭하는 “죄인이면서 주님의 벗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그것은 굳이 예수회원뿐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모두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