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心에 대한 나의 소견
언제인가 나는 동양 철학과 종교에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분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질문을 하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또 무엇이며,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그 분은
“그것을 알면 이미 道를 터득한 것이지요”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그 답변이 아마도 가장 적절한 답변이지 않나 생각한다. “無心에 이르는 길” 나
역시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그 분과 같은 답변을 할 수 밖에 없을지 모른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일처럼 어렵고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많은 경우 감정에 이끌리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곤 한다. 그러나 사실 마음이 무엇이고 또 어디에 있는가 부터 우리는 정의하기
어렵다. 어디에 있는지도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
따라서 나는 알고 있는 범위에서 無心에 대한 소견을
이야기할까 한다.
우선 불교에서의 無心은 부견(不見)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의 대상을 보지 않는 다시 말해 마음(心)이 모든
대상화 작용을 떠난 무분별(無分別)의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無心이라함은 일체의 분별이 일어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이는한
마음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목표로 하고 무엇인가를 그 내용으로 하며 무엇인가에 마음을 고정시키는데 이것을 곧 마음이 일어난다고 한다. 사실,
우리의 인식 구조는 대상을 바라보는 ‘나’라는 주관과 그 대상인 객관의 관계에서 있게 된다. 즉, 우리의 사유구조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분별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이 없으면 객관이 없고, 객관이 없으면 주관 또한 없게 되며, 우리의 인식 자체가 성립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유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객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는 주관이라는 나의 관념을 갖고 객관을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객관에 나의 주관을 포함하여 인식하므로, 객관을 참되게 그리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관이 포함된 객관의 인식은 참된 인식이라고 볼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객관에 주관의 인식 구조가 더해졌다면 그것은
이미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참된 인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참된 인식은 그러한 주관과 객관의 분별적 사고를 벗어나 객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無心이라 함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見을 뛰어 넘어 그 어떤 見에도 집착하지 않는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주관적 사유를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우리 마음 안에 일어나는 見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언제인가 나는 커피를 타려고 설탕통을 열다가 잘못해 설탕을 모두 탁자에 쏟아 버렸다. 그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설탕을 다시 통 안에 담으면 되는 것을, 내 마음 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내가 왜 쏟았지? 바보같이… 좀 더 주위를
했으면 쏟지 않았을텐데… 누가 보면 또 무슨 창피야… 이것들을 언제 통에 다 담나? 귀찮은 일이구먼, 쏟지 않았다면 안했을 일인데…” 쏟았다는
한 가지 사건을 통해 내 마음 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떠오르며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쏟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단순히 통에
다시 담으면 될 것을,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것들이 이처럼 우리를 혼돈 속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전철 맞은 편 좌석에 앉아 있는데 옷도 이상하게 입고 또 혼자서 이상한 행동을 계속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 마음에서 어떤 것들이 일어나는가?
“아니, 뭐 저런 사람이 있지? 옷차림은 저것이 뭐고 또 지금 혼자 뭐하고 있는 행동이야? 나는 저런 사람 딱 질색이다. 저러다가 갑자기 내게
달려들면 또 어떻하지?” 등 우리 마음 안에서는 온갖 것들이 일어날 수 있다.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은 내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내 감정과 주관적인 생각들을 섞어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아주 귀한
보석을 보았다고 하자. 우리 마음 안에서 또 어떠한 것들이 일어나는가? “저것을 바로 경찰에 신고해야 되나? 무척이나 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데…” 온갖 생각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 만일 그 보석이 거기에 없다면 또는 무심코 그냥 지나쳤다면 전혀 없었을 감정들이 내게
다가온다. 때로 우리 생활 중에 일어나는 많은 감정들은 애시 당초 그 사고의 대상이 없었으면 있지도 않았을 감정으로, 그 사고의 대상으로 부터
일어난 우리의 주관적인 감정들에 얽매여 살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렇듯 우리는 하루 중 만나게 되는 일들과 사람들 그리고 사물에 우리의
마음을 섞고 덮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나라는 주관에 의해 판단되는 분별심들을 없이하는 것이 바로 無心이다.
우리들이 사물을 볼 때 선입견이나 나의 주관적인 기준들이 앞서지만 그러한 선입견과 주관은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단지 그것은 우리의 한정된
인식 구조에 기인된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이러한 분별심들을 없이하고 無心의 경지로 나가도록 우리들을 초대하고 있다. 그것은 인식 주관과
인식 대상인 객관이 없는 그러한 인식으로, 이러한 般若의 지혜는 우리가 空을 터득할 때 비로소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무분별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을 통해 참 분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無我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無我를 통해 참된 我를 찾아 가는 것과 같다. 물론 참 我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한정된 언어로서는 규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이 我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무분별을 통해 참된 분별을 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 인간은 무분별을 위해 또 분별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렇게 논하는 자체가 바로 분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無心에 다다를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이것은 우리들에게 쉽지 않은 여정이다. 이것은 마음을 비운다는 것인데,
참으로 우리 인간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지 않나 생각 된다. 어찌된 일인지 비웠다 싶으면 또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고, 비워도 비워도 끝이 없이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인지 싶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마음의 그릇이라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는 관념처럼
물속에 집어넣어도 그릇 모양을 하고 있기에 물이 그릇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그 바람을 막아 주는 그러한 그릇이 아니라, 바람이
불면 이내 바람은 허공을 지나치듯 그릇을 통과하고 흐르는 물속에 집어넣어도 아무런 막힘없이 물이 흘러가는 그러한 그릇이 아닌가 생각한다. 단지
우리가 기존의 고정 관념대로 마음의 그릇에는 다른 것들과 차단되는 벽이 있다 생각하여 흐르는 물속에서 마음의 그릇이라는 벽을 만들어 물흐름을
차단하거나 아니면 이미 들어 와 있는 물을 우리 마음의 그릇 안에 가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렇듯 마음의 그릇을 닫고 무엇인가 내 마음
안에 가두어 둘 때 우리들은 또 번뇌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삶이라는 것은 흐르는 것 그리고 우리의 감정 또한 흐르는 것, 그러기에
우리가 마음의 그릇을 만들어 무엇인가를 내 안에 가두어 둘 때 그것은 또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들을 강요하는지 모른다. 차라리 우리 삶의 흐름이나
감정들을 그저 지나치게 하면 그만인 것을… 그래서 나는 마음의 그릇에 어떤 감정이나 생각들이 괴여 있거나 갇히지 않고 그저 왔다간 흘러가도록
노력해 본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그러한 흐르는 물속에 있는 지도 모른다. 차라리 뭐든 통과 시키는 우리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닫지 않고 열어
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마음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는 것을 우리의 관념이 내 마음이라는 그릇을 만들어 온갖 것들을 그 안에 담고
고민과 번뇌를 되풀이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어떤 심리학자는 우리 각자에게 마음의 필터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필터가
촘촘하여 많은 감정들이 걸리게 되고 또 어떤 이들은 필터가 넓어 웬만한 감정들은 그냥 지나친다고 한다. 그러한 감정의 필터에 의해 우리 안에
어떤 감정들이 머물게 되면 그것은 곧 우리 안에서 스트레스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필터의 크기를 스스로 넓히거나 좁히기란 쉽지 않다.
그건 타고 나면서 부터 이미 그 크기가 정해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도 우리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육체와 영혼 그리고
정신” 중에 보다 육적인 것에 가깝기에 정신 수련을 통해 또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걸림을 없이하는 것 또한 無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감정의 그물이며 감정의 머무름이다. 또한 그것은 집착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내가 ~해야
한다”라는 감정에 빠진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에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다. 즉, 다른 생각들에 빠지지 않고 그저
주어진 상황에 나 자신을 젖어 들게 하는 것이다. 일을 하면서 “이래야 되는데, 저래야 되는데”하는 것들이 모두 우리의 주관에서 오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운동선수가 너무 긴장하여 실제 경기에서 자신의 기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바로 이러한 경우일 것이다. 無心이란
바로 그러한 것들에 마음의 동요를 갖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시험 시간에 수학 문제를 푼다고 가정해 보자. 그 문제를 논리적으로 풀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마음 안에서는 “왜 나는 이것도 못 풀까?”, “빨리 풀어야 되는데…”, “언제 저 많은 문제들을 다 푸나?” 바로 이러한 생각들이 마음
안에서 일어난다. 바로 이런 분열된 마음이 우리 안에서 스트레스로 남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평화는 종종 그러한 마음에서부터
깨진다.
무분별의 마음은 모든 배타적인 마음을 버리고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러한 마음이다. 우리는 때로 너무 잘하려는
마음에 자신에 대해 실망하곤 한다. 그것은 자신이 완벽하여야 한다는 집착일 수 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다 그런 것이지 뭐”, “뭐,
그런 모습이 나인걸…”이라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대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대인관계에서 우리들은 우리의 주관적인 판단 때문에 서로 많은 상처를 주곤 한다. 우리의 주관이 상대방의 태도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우리의
주관을 섞어 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無心이 필요하다. 그것은 모든 대상으로
그리하여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주관적 판단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상황 안으로 젖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또 사랑의 눈으로 이 세상 모두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감정을 마음에 담지 않고 아무런 걸림 없이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며, 그 감정을 붙들고 있는 나의 마음에서 그것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화나는 것도 참고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집착하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또 사랑의 눈이다. 무작정 화를 참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집착이 되어 우리 안에서 스트레스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걱정과 근심 중에 있을 때 과연 내 마음 속에 무엇이 담겨져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을 우리들 마음에서 놓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때로 모두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순간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 즉, 자신의 인생이라는 시간을 정지 시키고 아무런 잡념 없이 그저 無心을 즐기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일들을
잊어버리고 모든 마음에 담지 않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휴식을 취하더라도 아무런 잡념 없는 철저한 휴식, 즉 無心의 휴식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 노력하고 있는 방법은 하루 중 그렇듯 마음에서 잡념들을 놓아 버리는 순간들을 의지적으로 몇 번이고 갖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잠들기 전에 모든 것들을 내 마음에서 놓아 버리고 잊은체 잠에 드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미사를 드리는 중에는 미사 직전까지 있었던 나의
모든 것들을 벗어 버리고 미사 그 자체에만 전념토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일에 임할 때 다른 분열된 마음을 버리고 오로지 그
일에만 몰입하는 것과 같다. 사실 우리 현대인들은 동적인 리듬에 익숙해 있기에 정적인 리듬을 찾기가 쉽지 않다. 無心에 이르는 그러한 정적인
리듬을 찾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그러한 환경을 찾거나 스스로 조성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체험을 소개할까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내가 군에 있을 때만 해도 무척이나 얼차례가 심했었다. 이제 갓 들어간 신참 이등병에게는 매일 밤 계속되는 그러한 기합이 공포의
시간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계속되는 시간에 지쳐 있던 중 어느 날엔가 나는 그 상황을 마음에서 놓아 버리고 그 상황 한가운데로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젖어 들어갔다. 그 상황을 대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바라보던 마음을 버리고 나의 모든 주관적 판단을 잊은체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후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또 아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주님,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며 내 마음을 열었을 때 얻었던 평화 역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물론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한
후에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니다. 단지 無心의 마음으로 그 일을 배타적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뜻에
맡긴다 함은 결과를 맡기는 것이 아니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그 과정을 無心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아무런 욕심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제대 후 한 친구에게 경험한 이야기들을 하였더니, 그 친구는 그것이 바로 마음을 비운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바로 그러한 순간이 無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주관적 분별들을
놓아 버리고 그 상황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마음을 비운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여는 것이며 이는 곧 배타적인 마음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받아들인다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無心에 대한 소견과 체험들을 나누었지만 여전히 無心의 마음을 갖는 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고 또 힘든 일로 내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