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자료

우리가 우리의 어둠을 만났을 때

손우배 2006. 1. 12. 22:22
우리 인간들은 모두 각자의 어둠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우리에게 있는 그 어둠을 만나게 될 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어둠을 대면해야 하는가? 현대 영성의 흐름은 우리 인간 각자가 모두 가지고 있는 어둠(영어표현으로는 ‘shadow’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여기서는 ‘어둠’으로 표현하겠다)을 더 이상 악으로 생각하고 배타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우리의 어둠과 함께 어울려 주님께로 나가는 영성으로 움직이고 있다. 즉 우리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통합시켜 살아가는 영성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어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면 아마도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롭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어려움과 아픔 그리고 우리의 결점과 죄악까지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은 바로 우리의 그림자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일일 것이다.

언제인가 나는 피정기간 중에 나의 어둠을 만나게 되었다. 그 동안 무척이나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으며 늘 거부하고 배척하였던 부분이었다. 따라서 나는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또 먼저 피했다. 나는 그것을 나의 부분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늘 다른 이들에게 특히 내 자신에게 부끄럽게 생각하였고 스스로 비난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떻게 내 어둠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나의 어둠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영적 지도 신부님께 말씀 드렸더니, 신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관상을 내게 제안하였다. 그것은 “‘나’와 ‘예수님’ 그리고 ‘나의 어둠’이 만나 셋이 함께 대화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매우 중요한 요점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이 관상을 통해 내가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여기서 글 읽는 것을 멈추시고 여러분 스스로 먼저 관상해 보시기를 초대한다. 아무래도 미리 관상한 내용을 읽게 되면 여러분들의 관상에 선입견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만나는 장소를 설정해 보자. 그것은 광야라도 좋고 도시의 한 복판이라도 좋고 또 산 속이라도 좋다. 자신이 편한 장소를 택하고 그 곳에서 나와 나의 어둠 그리고 예수님이 만나는 모습을 관상해 보자. 예수님은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 또 그분의 표정은 어떠한가를 보라. 그리고 나의 어둠을 바라보자. 그는 어떤 표정을 하고 또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당당한 모습으로 있는가? 아니면 초췌한 모습으로 있는가? 그리고 셋이 함께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자. 예수님과 내가 나누는 대화, 나와 나의 어둠이 나누는 대화 그리고 나의 어둠과 예수님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자. 무슨 대화들을 나눌까? 이 때 우리는 관상하고자 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관상은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에서 관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냐시오 성인께서도 이러한 관상은 기도 전에 주변 분위기를 맞추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기도하는 자세는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대로 자신이 편한 자세 즉 기도하기에 편한 자세를 택한다. 소파에 앉아서 할 수도 있고 엎드려 할 수도 있고 또 무릎을 꿇고 할 수도 있으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할 수도 있다. 물론 산보를 하며 기도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기도하기에 편한 자세를 잡는 것이 좋을 것이다. 먼저 준비기도를 통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앞서 언급한 장소와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또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는 것이다. 이 때 성령께 이 기도를 통해 깊이 하느님을 체험 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는 것도 좋고 또 특별히 자신이 받고 싶은 은혜를 청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요점으로 잡는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관상하는 것이다. 이 때 특정 부분에서 큰 은총을 느끼게 된다면 충분히 시간을 갖고 음미하면서 머무르는 것이 좋다. 그리고 기도를 마친 후에는 이 기도를 통해서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특히 기도 중 어떤 부분을 개인적으로 감사하며 마무리 기도를 드린다. 기도 후에는 시간이 된다면 바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지 말고 차를 마시던 산보를 하던 좀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면서 기도 중에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났던 것들을 돌이켜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읽는 것을 잠시 멈추시고 충분히 기도한 후에 다음 글을 계속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대화의 내용은 관상한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또 같은 관상이라도 그 내용은 기도할 때마다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상은 한 번에 끝내지 않고 몇 번을 되풀이 하여 관상할 수도 있다. 아래의 글은 저의 대화 내용을 짧게 정리한 것이니, 여러분들께서는 단지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우선 예수님을 만나 변명하기 시작하였다. “주님, 저는 언제나 당신을 온전히 섬기고 싶지만 늘 저 어둠이 저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 어둠을 없이하고 온전히 당신께 나갈 수 있을까요? 제발 저 어둠을 없이 하소서! 제가 이렇듯 악에 빠지는 것은 모두 저 어둠 탓입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어둠에게 이야기하였다. “어둠아, 너는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 것이냐? 제발 좀 내게서 떠나다오! 너는 내 인생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나의 이런 비참한 모습은 모두 네 탓이다!”

그러자 어둠은 내게 이야기하였다. “저는 당신 집에 얹혀사는 당신의 어둠입니다. 그런 주제에 늘 당신의 삶에 어둠을 드리우게 하는 제가 너무나도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어떻게 이 죄송한 마음을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늘 당신 인생의 걸림돌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당신께 너무나도 큰 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둠은 예수님께 이야기하였다. “주님, 당신은 처음부터 제가 그의 집에 함께 머물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늘 그를 괴롭히고 그의 인생의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잘하려고 했지만 저 때문에 늘 그르쳤습니다. 그의 과오는 모두 제 탓입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자 이게 웬일인가 예수께서는 너무나 자비롭고 동정어린 눈으로 그리고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끌어안으며, “그래, 내가 다 알고 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냐. 내게 오너라. 내 안에서 편히 쉬거라”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내게 “네가 가난한 이웃과 버림받은 형제들을 찾고자 한다면, 바로 이 어둠이 네 형제요 네 이웃이다. 사랑하여라.”

결국 예수님 앞에서 의인으로 받아들여진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어둠이었다. 나의 어둠은 겸손하였고 나는 교만하였던 것이다.(루가 18:9-14 참조)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나를 위로하시기 보다는 나의 어둠을 위로하시고 더욱 사랑하여 주셨던 것이다. 어쩌면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어둠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어둠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그 어둠을 만났을 때 우리는 주님과 같이 사랑스런 눈빛으로 즉 주님의 눈으로 우리의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둠 속에 머물러 있더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사랑 안에 머물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또 이 관상을 마치면서, 다른 이들의 어둠을 사랑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관상하여 보았다. 이를 통해 나는 다른 이들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나약함을 끌어안고 계시는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아무리 그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계십니다”라고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을 가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