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자료

화해의 성사 (고해성사)

손우배 2006. 1. 9. 17:28
1) 화해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의 계시에 의해 죄인임이 드러났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의지적으로 그 끝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그 관계를 끊어 버림으로써 죄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은 그런 우리를 받아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탕자의 비유”에서와 같이, 방탕한 아들이 집에 돌아가기 전에 이미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다. 그러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과의 화해는 공동체 안에서 또한 이루어 져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은 인간들 사이에서 형제적인 화합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

요한이 제자들을 시켜 예수를 찾아가게 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불행으로 상징된 죄인들을 위한 기쁜 소식을 말씀하셨다. 마태오라는 세리의 경우를 보자. 모든 이들이 죄인으로 멀리한 그를 예수께서는 찾아가신다. 그리고 그날 마태오 집에서 있었던 저녁 식사에도 자신들이 제외되었다고 생각하던 죄인의 무리들이 모인다. 이것이 복음에 나타난 ‘교회’의 첫 묘사이다. 이것은 현재의 우리 교회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준다. 이와 같은 사랑의 성사인 고해 성사를 마태오 복음 18장에서 보면,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루는 성사는 형제적 화해이며, 결국 화해는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 개인적인 화해에 치중하는 고해 성사는 보다 공동체적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도들에게 당신 사명을 전달해 주신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죄의 용서이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교회를 죄를 용서하기 위한 도구, 능력, 장소로 제정해 주신 것이다.

3) 교회에 맡겨진 화해의 직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세상을 성부와 화해시키시고, 교회가 세상에서 이러한 화해의 장소이자 표지가 되도록 하셨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재발견하며, 하느님의 화해의 선물이 서품 받은 직무자의 봉사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였다.

쟈끄 마리땡은 매번 고회소에서 소죄까지 고해하는 것보다는 중죄만을 고해하고, 참회의 공동예절을 활성화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것이다. 복음서에서 이미 제시한 바와 같이 고해성사는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간음한 여인’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예수께서 공적으로 하신 말씀은 모든 이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고, 공적으로 모든 이들이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던 것이다.

또한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실 때 보이신 행동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죄인에게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으시고 죄를 용서하셨다. 아마도 예수께는 우리의 고뇌를 그분께 드러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며 우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과 간음한 여인이 자신의 죄를 침묵 중에 인정한 것이나, 베드로의 괴로움 속의 침묵과 같은 태도들이 성사적 ‘고백’의 출발점인 것이다. 이처럼 용서는 언제나 고백을 앞서 나간다.

4)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

‘고백’이란, 죄인이 스스로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서 잘못을 저질렀음을 인지하고, 참된 회개를 위해 요구되는 규정을 스스로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용서의 대상은 언제나 공적인 죄들이었다. 따라서 1-5세기는 공적 고해성사만 있었을 뿐이다. 즉, 공동체적인 참회와 화해만이 있었던 것이다. 중죄인 경우에도 형제적 교정을 통하여 공동체적인 사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적 화해는 반복될 수 없는 ‘제2의 세례’로 이해되었다. 그러다가 6세기에 개별고백과 정가고백이 있게 되었는데, 여기서의 주된 관심은 속죄에 있었다. 그 후 교회 내에는 사적 고백만이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공의회에서는 고대 공적 참회 고백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고, 9세기 마인즈의 대주교는 고백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겸손에 의해 고백 자체가 속죄가 됨을 강조하였다. 즉, 부끄러움이 보속을 대신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론은 12세기말 고해성사 신학이 되었다. 결국, 교회에서는 대죄의 경우에 고백을 하도록 의무화하였고, 이제 사적 비밀 고해성사는 공적 고백 제도를 압도하였다.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사적인 성격을 더 강조하여 고백의 행위 보다는 사제가 베푸는 사죄행위를 더 절대시했다. 이는 화해로서의 참된 예절을 거행한 고대의 전통과는 매우 달라진 이해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고대 참회 예절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함께 했으므로 하느님과의 화해의 성사는 교회 공동체와의 화해였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또한 자기 형제를 사랑한다.”(1요한 4,21) 따라서 우리의 고해성사 역시 공동체성을 되찾아야만 한다. 고해 성사에서 우리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전교회와 화해한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5) 화해성사의 삶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화해의 성사란 무엇일까? 그것은 공동체적인 사랑과 화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고해소에서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참된 화해의 성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오래 동안 서로 불신하고 반목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두 사람은 그러한 감정이 들 때마다 고백소를 찾고, 또 서로 화해를 시도하지만 늘 실패하였다. 그러던 두 사람이 어느 날인가 참 의미에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참된 화해성사의 완성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화해성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언제인가 한 형제가 오래 동안 자신만이 간직해온 어두운 과거를 많은 형제들에게 함께 나누며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다. 함께했던 모든 이들은 그 형제의 고백을 듣고 함께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 형제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그 형제에게 다가가 아픈 그 형제의 과거를 진심으로 감싸주고 함께 아파해 주었다. 나는 그 순간 하느님의 공동체적 화해성사가 바로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참된 화해의 성사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져야하고 완성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참된 화해성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삶이 참된 화해성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오늘 하루 화해성사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