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자료

원죄(原罪)에 대하여

손우배 2006. 1. 9. 17:20
원죄(原罪)는 교회의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에게 죽음과 육체의 고통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우리는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원죄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죄의 전염성이라든가 세습성에 대해 이해할 것인가?

먼저 성서의 아담 이야기를 살펴보자.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 그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읽어야만 한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 이후에 자신들의 역사를 신앙의 관점에서 성찰하여 쓴 글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현재 상황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어떻게 죄는 세상에 들어왔으며, 왜 그들은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그토록 멀어졌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의 상황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어떻게 죄를 짓게 되었으며 또 우리는 어떻게 하여 하느님으로 부터 멀어지게 되었나하는 우리 자신들의 질문인 것이다.

우리는 아담 이야기를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성’과 ‘역사성’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그것은 이 이야기 자체가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 차원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죄를 이스라엘 공동체의 ‘전체성’과 ‘역사성’ 안에서 생각하였으며, 죄에 대한 의미를 근원적인 죄와 연관 지어 그들 자신의 죄 뿐만이 아니라 그 죄의 뿌리로부터 용서를 청하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아담은 사과를 먹음으로 해서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유혹에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기게 된다. 이처럼 죄의 근원은 우리 현존재의 핵심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있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어떠한 종속적인 관계도 부정하며 스스로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기를 욕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에 대한 집착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사회의 모든 악들이 이러한 자기 집착과 교만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의 주인을 결코 하느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죄는 이 같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통해 오게 된다. 이러한 자기 집착은 우리가 우리의 ‘전체성’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자기의 관념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나의 중심에 모실 수 있게 될 것이다.

죄에는 ‘역사성’과 ‘전체성’이 있다.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도 결코 인류 전체의 역사와 세계에서 분리된 체 존재할 수 없다.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인류의 역사와 세계에 필연적인 상호관계 안에서 존재하게 된다. 그러면 먼저 죄의 ‘역사성’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의 죄에는 역사적인 측면이 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세상은 그 사람에 의해 더럽혀 지고 우리의 후손은 그 한 사람에 의해 이미 더렵혀진 세상에서 태어나게 된다. 아담에 의해 선(善)으로 창조된 세상은 더럽혀졌고 이것은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되고 또 우리는 이것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더럽혀진 세상에서는 나도 모른 체 그 죄에 물들어 그 죄를 계속하게 된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죄로 내가 세상을 더럽히게 되는 것이고 이런 나의 죄는 다른 이들에게 퍼져 나가게 된다. 요즘의 세상을 보더라도 주위의 환경과 사람들에 의해 청소년들은 자기도 모른 체 우리들의 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죄의 전염성이며 이러한 죄는 또 우리 후손들에게 대대로 세습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아담이라는 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죄는 세상에 오게 되었고, 바로 그 사람을 통해 세상은 더럽혀졌다. 또한 그의 후손들은 이미 더럽혀진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고, 태어나면서부터 선조들의 악에 물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죄는 전염되며 세습되어 지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 인해 세상에 죄가 오게 되었고, 내가 죄를 지음으로 해서 내가 세상을 더럽히고 있는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더럽혀진 세상은 다시 그 빛을 찾게 되었으며 그 빛이 세상으로 전해지고 또 세습되어 후대에 까지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전하게 될 때 나는 역으로 더럽혀진 세상을 맑게 정화하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해서 내가 세상을 더럽히고 또 세상에 내 악을 퍼뜨리는 반면에 내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삶으로 해서 나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깨끗하게 하고 또 이러한 그리스도의 빛이 나를 통해 세상으로 퍼져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성’은 무엇일까? 어떻게 다른 이의 죄가 내 죄가 될 수 있으며 내 죄가 다른 이의 죄가 될 수 있을까?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세상에 전체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떻게 세상으로 부터 완전히 분리된 인간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나와 세상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을 명확히 구분하는 서양 철학의 사고체계에서 온 것이다. 나와 너, 나와 세계 그리고 나와 하느님. 그러나 동양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주관과 객관을 분별하여 생각하는 사고로는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주관과 객관의 관념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참된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을 대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대상으로서의 하느님 관념을 잃게 되면 우리의 눈은 자연히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고 우리는 비로소 ‘전체성’의 의미를 깨달을 수가 있다. 또한 이러한 ‘전체성’의 부정은 ‘나’라는 관념을 중시하는 우리의 자기 집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전체성’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예수께서 말씀하신 “네 이웃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말씀이 단지 비유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죄 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죄 또한 우리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죄의 사회적 측면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죄는 곧 나의 죄이며, 나의 죄는 곧 우리 사회의 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체성’에는 앞서 이야기한 ‘역사성’이 또한 포함된다. 그것은 ‘전체성’ 안에는 시간과 공간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우리가 죄의 ‘전체성’과 ‘역사성’을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원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