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15분을 찾아감 - 기다리시는 하느님
오래전 나는 평창동에 있는 공동체에 머물면서 매일 마포구 신수동에 있는 예수회 관구본부로 출근을 하였다. 승용차 1대로 여러 신부님들이 함께 아침마다 출근을 했는데, 출근시간은 오전 9시 15분이었다. 나는 사무실에 9시에는 앉아서 일을 시작해야 된다는 생각에 당시 수도회 장상이셨던 신부님께 8시에 떠나자고 했다. 신부님은 “9시 15분이 제일 적당한 시간인데…”라고 말하셨지만 내가 계속 8시에 가자고 하니 “그럼, 그렇게 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출근시간인 관계로 차가 너무 막히어 사무실에 도착하니 1시간 가까이 출근시간이 소요되었다. 차라리 조금 늦게 출근하고 그 전에 공동체에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나았다. 해서 나는 다시 시간을 수정하여 8시 30분에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신부님은 또 “그렇게 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여전히 출근시간이 그다지 단축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국 9시 15분에 출근하기로 했고, 출근시간은 3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가장 적당한 출근시간이 9시 15분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신부님도 “글쎄 9시 15분이 좋다니까…”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선배이고 또 전에 여러 번 시도해본 결과 9시 15분이 가장 적당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아마도 보통 우리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그동안 시도해보니 9시 15분이 가장 출근하기에 적당하다. 그러니 괜한 말하지 말고 그냥 9시 15분에 가도록 하자.” 자신이 나이 많은 선배이거나 스스로 경험이 많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험 없는 아랫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신부님은 정답을 내게 들이밀고 강압적으로 명령한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9시 15분을 찾아갈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양성하시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리 스스로 9시 15분을 찾아가도록 하느님께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나는 처음에 왜 철없이 자신의 몫을 달라는 작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의 몫을 나누어주었을까 생각했다. “안 된다. 네 몫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면 너는 반드시 그 재산을 다 탕진하고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려 할 것이다. 그러다 결국 너는 나를 찾아와 자신을 품팔이꾼이라도 삼아달라고 애원할 것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라.”고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말대로 재산의 몫을 나누어 주었고,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또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부활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조용히 부활하셨을까? 군중 앞에서 부활하셨다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을 믿었을 텐데… 왜 주님께서는 지금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한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시지 않고, 사람들이 하느님의 존재조차 의심하게 하시는가? 하늘에서 항상 당신이 내려 보심을 사람들이 볼 수 있다면 모두 당신을 믿을 텐데… 때때로 우리는 그분의 말씀조차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예수님께서는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나타나시어 “내 집을 고쳐라.”는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성인은 그 말씀이 성당을 보수하라는 것인 줄 알고 지붕 위를 올라갔다고 한다. 나중에 그 말씀은 성당이라는 건물이 아니라 병든 당신의 교회를 치유하라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정답을 가르치시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 알아가도록 이따금 표징을 보여주실 뿐이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 답을 찾아가고 해결하기를 기다리신다. 하느님은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당신 말을 따르는 로봇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벗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마치 힌트를 가지고 퍼즐을 풀어나가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결코 정답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인간 스스로 9시 15분을 찾아가도록 기다리신다.
하느님은 기다리심이다. 나도 내 주변 사람들을, 특히 나이 어린 사람들을 기다려주는 미덕을 청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