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자료

일상에서의 "영적 위로(충만)"와 "영적 실망(메마름)"에 대하여

손우배 2008. 6. 18. 19:33

일상에서의 영적 위로(기쁨, 충만, consolation)”영적 실망(고독, 메마름, desolation)”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기쁨 속에 지내다가도 어떤 때는 하느님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져 실망과 좌절 속에 그분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영적인 메마름 속에서 지낸다. 우리는 전자를 영적 위로(기쁨, 충만, consolation)라하고, 후자를 영적 실망(고독, 메마름, desolation)이라고 말한다. 이냐시오 성인은 그의 영신수련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영적 위로와 실망이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피정 중에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일상 중에서도 이처럼 영적 위로와 실망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적 위로(충만)와 실망(메마름)은 무엇이며, 또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

 

영적 위로(기쁨, 충만, consolation)란 우리에게 믿음, 희망, 사랑을 키우는 모든 것과 주님 안에서 우리의 영혼을 평온하게 하면서, 우리를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늘나라의 가치로 부르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모든 내적 기쁨[316]”을 말한다. ,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서 그분 사랑으로 가득하고,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면서, 그분의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한 시기를 말한다. 이는 하느님과 그분의 천사들이 우리 영혼에 감동을 일으켜서 진정한 즐거움과 영적 기쁨을 주는 것이다.[329]”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 여러 가지를 통해 종종 그분의 현존과 사랑을 느끼곤 한다.(원인 있는 영적 위로) 또 어떤 때는 아무런 이유 없이 전혀 예상하지 않은 때에 그분의 사랑에 휘어 잡히곤 한다.(원인 없는 영적 위로)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감정은 우리가 문득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한 매우 인격적인 영적 위로를 의미한다.

 

좋은 책, 음악, 영화 또는 어떤 사람들의 생각이나 사상(思想) 그리고 어떤 사람들과의 만남 등과 같이 일상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것들이 우리에게 영적 위로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원인이 있는 영적 위로는 선한 천사나 악한 영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331] 악한 영은 선()을 가장하여 처음에는 거룩하고 좋은 생각이 들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제 본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를 사악한 의도에 빠져들게 한다.[332] 따라서 우리는 생각과 감정에 유의하여 우리 자신을 신중히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처음, 중간 그리고 끝이 모두 좋은 체험이고 모든 일에 선을 지향한다면, 이는 선한 천사의 표지이다. 그러나 결과인 열매가 악이거나, 처음과는 다른 길로 벗어나 있거나, 전에 가졌던 평화와 안정, 침착성을 빼앗아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되었다면 이는 악한 영에서 왔다는 분명한 표지이다.[333] 따라서 그것이 계속해서 내게 영적 기쁨을 주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요즘처럼 수많은 정보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때론 그릇된 사상에 빠지는 것도 처음에는 그것이 선하고 좋은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식별할 때도 이렇듯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결과들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계속해서 같은 느낌과 같은 가치를 유지하며 좋은 결과를 갖게 된다면, 그것은 옳은 식별과 선택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느낌은 쉽게 변하는 외면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 내면을 흐르는 느낌을 말한다.

 

이렇듯 원인 있는 영적 위로는 식별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 없이 오는 영적 위로는 오로지 하느님에게서만 오는 것이다. 여기서 이유 없이는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미리 주어져서 이것과 관련되어 오는 위로가 아니라는 뜻이다.[330] ,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때론 아무런 이유 없이, 전혀 기대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느끼며 커다란 위로 중에 머물 때가 있다. 바로 이러한 위로는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위로인 것이다.

 

따라서 영적 위로는 다음과 같이 비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면, 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돈이 많아서? 능력이 있어서? 성격이 좋아서? 잘 생기거나 예뻐서? 성실하고 근면해서? 순수해서? 아니면 느낌이 좋거나, 이유는 될 수 없지만 그냥 좋기 때문에? 전자는 처음, 중간 그리고 끝을 보면서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참으로 그 사람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적 위로도 그 시기와 뒤따라오는 시기, 즉 영적 위로로 인해 아직 은총 중에 있는 시기를 잘 살피고 식별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이 때 자신의 고유한 생각과 판단의 습관에 의해 또는 선한 영이나 악한 영에 의해, 우리 주 하느님에게서 직접 주어지지 않은 여러 가지 다른 생각과 의도들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336] 따라서 우리는 그 느낌과 열매들을 지속적으로 관찰하여야 한다. 참된 영적 위안으로 처음에는 좋은 열매를 맺다가 우리의 나약함과 교만으로 인해 때론 선한 천사가 인도하는 길을 벗어나 악한 영의 길을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악한 영은 우리가 영적 위안 중에 있을 때도 계속해서 우리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영적 실망(고독, 메마름, desolation)이란, “영혼이 어둡고 혼란스럽고,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기울며, 여러 가지 심적인 동요와 유혹에서 오는 불안감 등으로 믿음을 잃고 희망도 사랑도 없어지며, 게으르고 냉담하고 슬픔에 빠져 마치 자기 창조주 주님으로부터 떨어져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상태이다.[317]” ,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중에 있을 때, 실패와 좌절 중에 있을 때, 그리고 죄와 유혹 중에 있을 때 이러한 영적 실망을 느끼곤 한다. 이는 홀로 광야에 있는 듯 한 외롭고도 고독한 체험이며,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한 느낌으로, 메마른 샘(dry well)과 같은 영적 건조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적 위로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시기라면, 영적 실망은 그러한 열망은 온데간데없고 인생이 무의미하고, 무료(無聊)하기까지 하며, 굳은 믿음을 잃어버린 냉담한 시기를 말한다. 때론 이러한 영적 실망이 하느님께 중대한 결심을 드린 후에 찾아오곤 한다. 우리가 선한 결심을 할 때 선한 천사가 우리를 인도했듯이, 악한 영은 그러한 결심은 너무 어려운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네가 결코 행할 수 없는 결심이다.”라는 말로 우리를 설득시키려 한다. 따라서 영적 위로 중에 결심한 것들은 당연히 영적 실망 중에 변경해서는 안 되며, 또 새로운 결심을 해서도 안 된다. 그러한 마음은 결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18] 마찬가지로, Desolation 중에 든 생각이나 판단은 거짓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악한 영들에게 왜 이러한 영적 실망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이냐시오 성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322]

 

첫째, 우리가 영적인 생활에 미온적이거나 게으르거나 소홀하기 때문으로, 바로 우리 자신의 탓으로 영적 위로가 떠나간 경우이다. 우리가 자신을 주님 앞에 온전히 내어 드리기를 주저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하느님께서는 영적 실망을 통해 우리 자신의 태만을 일깨워 주신다. 우리는 선한 결심을 했다가도 이내 우리의 나약함으로 그것을 잊어버리고 생활하거나, 다른 세상 욕심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살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는 영적 위안을 잃어버리고, 영적 메마름과 실망 중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일깨워 주시기 위해 악한 영에게 영적 실망을 허락하신 것이다.

 

둘째, 위로와 은총 없이 하느님께 드리는 봉사와 찬미의 길을 우리 스스로 얼마나 나아갈 수 있는지, 우리의 사랑과 성실함을 시험하시는 것이다. , 우리를 담금질하기 위함이요, 정화를 위함이다.

 

셋째, 원인이 있건 없건 우리가 갖게 되는 모든 영적 위로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모두 우리 주 하느님의 선물이고 은총임을 마음 속 깊이 느끼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어떤 교만이나 허영심에서 그러한 영적 위로가 우리 자신의 것인 양 생각하며 거기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영적 위로는 순수한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영적 위로를 스스로 만들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어떤 행위나 무엇을 해서 내적 평화를 얻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작품일 뿐이다.

 

우리는 피정이나 기도 중에 또는 일상생활 중에서 하느님 체험으로 가슴 뜨거워지는 순간이 있지만, 후에 똑같은 체험을 하면서도 별다른 감응을 느끼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이 때 우리는 전에 체험한 시간들이 순수한 하느님의 은총임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위로 중에 있을 때는 그러한 은총이나 위로가 없는 실망 중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생각하며 되도록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324]

 

이냐시오 성인이 언급한 위 세 가지 이유에 더하여, 넷째, 우리는 영적 실망 중에 사랑과 기쁨을 배우게 된다. 우리가 영적 위안 중에 있을 때는 우리는 가만히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 실망 중에 있을 때는 이제 우리가 그분께 사랑을 드리는 것으로, 우리의 굳은 믿음을 주님께 보여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실망 중에는 내가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적 실망 중에 있을 때,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무엇보다 영적 실망 중에 있을 때에도 우리는 악한 영에 대항하기에 충분한 은총을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있으며 또 그분의 도우심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324]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큰 열정과 넘치는 사랑과 열렬한 은총은 거두었지만 영원한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은총을 충분히 남겨두셨기 때문이다.[320] 또한 이러한 영적 실망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영적 실망에 반대되는 노력들을 계속 할 때 머지않아 위로를 받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321]

 

이냐시오 성인은 영적 실망에 거슬러 강하게 반응하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므로, 의도적으로 기도생활에 더욱 시간을 할애하고 더 많은 영성생활을 하도록 강조한다.[319] 악한 영은 우리가 유혹에 저항하여 정반대의 행동과 단호한 태도를 취하면 기력을 잃고 돌아가지만, 반대로 우리가 겁을 먹고 유혹에 기가 꺾이면 더욱 기세를 내어 우리에게 달려들기 때문이다.[325] 악한 영은 우리가 영적 실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끝내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을 가장 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큰 죄나 좌절, 메마름 중에 있어도, 내가 지금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다고 하여도, 주님께서는 이 상황을 헤쳐 나아갈 충분한 은총을 주셨기에, 나는 두려워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그분의 자비심을 믿고 용기 내어 일어나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실망과 좌절은 결국 우리를 더욱 헤어나지 못하게 할 뿐이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때론 광야의 고독과 시련으로 초대되어 지곤 한다. 그곳은 우리가 아무리 울부짖어도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순간이다. 그 침묵은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의해 인도되신 광야에서, 그리고 겟세마니 동산과 십자가 위에서 경험하신 침묵이다. 성모님 역시 가브리엘 천사가 떠난 후에, 혼자 남아 자신의 다가올 현실을 깨닫고는 마치 광야에 홀로 있는 듯 한 두려움을 느끼셨을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 라고 말씀하셨던 순간은 바로 영적 위로의 시간이었다. 그런 후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 곁을 떠나갔다.”(루카 1:38) 성모님은 아기를 가진 후에 계속해서 아버지의 원망과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으로 마음이 편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요셉도 파혼하려 하고, “과연 이 아이를 어떻게 혼자 키워야 하는가!” 고민하셨을 것이다. 막상 라고 답은 했지만 현실은 쉽지가 않았다. 성모님께는 위로가 필요했고, 그나마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다. 그리고 엘리사벳을 만나는 순간, 성모님께서는 비로소 자신의 소명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시게 된다. 바로 영적 실망(고독, 메마름, desolation) 중에 자신의 소명을 라고 확인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오 3:17)라는 말씀을 들으시며, 큰 영적 위로를 받으신다. 그리고는 바로 광야에 인도되어 영적 실망(고독, 메마름, desolation)의 시간을 보내시면서, 세상에서의 자신의 소명을 참으로 받아들이시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겟세마니 언덕에서, 십자가 위에서, 이처럼 예수께서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시고 이루신 때는 영적 실망(고독, 메마름, desolation) 중이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우리의 소명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때는 영적 위안 중이 아니라 영적 실망(고독, 메마름, desolation) 중이다. 그러기에 영적 실망(고독, 메마름, desolation)이 우리 일상에서 소중한 것이다. 영적 위안 중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우리는 영적 실망(고독, 메마름, desolation) 중에 하느님께 응답 드리며 우리의 소명(그분의 사랑)을 완수하는 것이다. 영적 실망(고독, 메마름, desolation)은 성모님과 예수님께서도 경험하셨던 우리 인생의 일상적인 것이다.

 

일상 중에 경험하게 되는 영적 실망과 고독 그리고 메마름 중에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굳센 믿음이다. 우리가 그러한 믿음을 지속적으로 간직할 때, 실망은 머지않아 위로와 기쁨으로 바뀜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어떤 의미 있는 행동을 타인에게 함으로써 위로의 체험을 할 수 있으며, 거룩함에 대한 생각이나,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그리고 의도적으로 적극적인 사랑을 마음으로 표현하며 우리는 영적 위로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비움)을 통해 우리는 위로를 체험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영적 실망을 거슬러 강하게 자신을 반응시키는 노력인 것이다. , 기도와 행동을 통해 나를 예수님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주님의 사랑을 믿고 용기 내어 일어나 그분께 달려가는 것이다.

 

우리가 늘 영적 위로 중에 머물고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 자신의 나약함으로 그리고 세상이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하느님께서 앞서 언급한 이유들로 인해 우리를 영적 실망 중에 있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는 때는 Consolation이 아니라 Desolation이다. Consolation 중에 있었던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바로 Desolation 중에 완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Desolation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Desolation은 하느님의 침묵이 흐르는 곳으로, 고통과 시련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무력감과 무료함 그리고 죄 중에 있을 때이.

 

하지만, 지금 우리가 영적 실망에 머물러 있기에 영적 위로가 없어진 듯 보여도, 우리에게 있었던 영적 위로를 추억하며 그 기억으로 살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떠나 비록 지금은 함께 하지 않기에 전과 같이 그 사람과 사랑을 나눌 수는 없지만,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는 멀리서나마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언제가 다시 만나 함께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음도 알고 있다. 따라서 내게 있었던 영적 위로의 기억은 내게 용기를 주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추억하며, 그분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리고 언제이고 함께할 그 시간을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린다. 영적 고독이 깊을수록 찾아 올 영적 위로의 깊이도 그만큼 하나 가득한 은총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영적 위로가 하느님께서 내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라면, 영적 실망 중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을 그분께 보여드리는 것이다. 영적 위로 중에는 우리는 기름진 땅에서 샘물을 찾았다면, 영적 실망 중에는 메마른 땅에서 샘물을 찾는 것이다. 사실 은총이 충만한 가운데는 누구든 쉽게 샘물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영적 실망 중에는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러기에 그 샘물은 더욱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께 내 사랑을 보여 드리는 것은 바로 영적 실망 중이다. Consolation 중에는 내가 영광을 받고, Desolation 중에는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타볼산 위에서 마냥 머물 것이 아니라, 산을 내려와야 한다.(마태오 17:1-9) 내려와 우리의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마냥 Consolation 중에 머무를 수는 없다. 인생은 세상으로의 육화이며, desolation으로의 파견이다. 그것은 타볼산 아래 우리 일상으로의 파견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영적 위로와 실망(메마름)의 반복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러한 영의 활동을 영신수련 피정 중에 우리가 식별해야할 것으로 소개하였지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계속해서 이러한 영의 활동을 식별해야만 한다. 악한 영이나 선한 천사는 피정은 물론 우리 일상 중에도 계속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영의 활동이 자연스러운 영적 여정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하여 영적 실망과 메마름 중에 있을 때 의기소침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상황을 거부하지 않고 인생의 한 부분으로,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와 사랑을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Desolation은 우리가 하느님께 라고 응답하는 시기이며, 그분을 참으로 만나는 시간이다.

 

※ [ ]안의 번호는 “영신수련” 책에 명시된 번호임.

일상에서의_영적_위로와_실망.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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