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및 성찰

부와 가난의 구조

손우배 2007. 5. 9. 22:52

요즘 한 대기업 회장의 폭행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자신의 아들이 클럽 종업원과 말다툼 끝에 폭력을 당한 것에 분개해 경호원들을 이끌고 클럽 주인과 종업원들을 폭행한 사건이다. 나는 남과 다르다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회장으로서는 자신의 아들을 클럽 종업원들이 감히 폭행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지켜본 사람들도, 현장을 달려온 경찰들도 그 사실을 덮으려고만 하였다. 인근에서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한 사람은 보복이 두렵고 워낙 상대가 힘 있는 사람이니, "차라리, 대기업 총수에게 뺨맞은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하자"는 체념의 말을 하였다고 한다. 힘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 횡포에 모두 침묵한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흔하게 경험하는 현상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복음을 통해 가난의 덕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마치 가난 그 자체가 미덕인 것처럼 생각되어 때론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성장 지향적인 우리들에게 특히 돈이 세상 가치의 기준이 되고 있는 현실에 이러한 가난의 덕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은 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교회는 가난의 미덕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자는 부 그 자체만으로 죄인일까? 인간이 추구하는 풍요로움 그 자체가 죄인가?

한 대기업 회장의 폭행사건에서 보듯 세상에서 부는 권력이고 힘이다. 즉 힘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앞세워 없는 이들을 무시하고 억압하곤 한다. 따라서 부는 그 자체로 죄가 아니라 그로인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권력으로 짓밟을 때 죄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은 재산 형성 과정에서부터 있을 수 있다.

폭력이라는 구조는 교만의 틀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부,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자신을 특권화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서 가난을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가난은 낮은 자이고, 겸손을 의미한다. 즉 가난은 겸손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난 그 자체의 궁색함이 덕이 아니라, 가난의 기본 틀인 겸손이 바로 덕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고백하고, 주어진 상황을 욕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앞에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다.(마르코 1:7) 하지만 부자는 바로 그 교만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신다.(마태오 19:24)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가장 약한 부분 중에 하나가 교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캐오와 같은 겸손한 부자와 다윗과 같은 겸손한 권력자들도 있었다. 오히려 가난하면서도 교만한 자가 있다면, 가난 그 자체가 그를 하늘나라로 인도하지는 못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정의가 짓밟히는 곳에는 이와 같은 교만의 구조가 있다. 그것은 폭력이다.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휘두르는 그런 폭력이다. 선진국들이 힘을 앞세워 약소국가를 유린하는 것이나, 아프리카의 힘 있는 자들이 부를 축척하기위해 힘없는 사람들을 가난으로 몰아넣는 것이나, 국가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힘없는 국민들을 무시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나, 경제력을 가진 대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중소기업이나 소비자들을 우롱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일상 안에도 이러한 폭력의 구조가 산재해 있다. 드러난 양상은 다르지만 그 구조에 있어 같은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누군가 내게 무엇을 부탁할 때 그 순간 나는 힘이 있고 상대는 약자일 경우가 많다. 그때 내가 상대를 무시하고 그것을 이용해 상대에게 무엇을 얻으려고 한다면 나 역시 그 폭력의 구조를 따르는 것이다.

언젠가 직장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아래 직원이었지만 나와 부서도 다르고 또 기술력이 월등했기에 늘 부탁을 하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그 직원이 안 된다고 주장하면 어찌할 수 없기에, 분위기를 맞춰가며 부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내가 정말 가난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가진 것이 많아 부유하였고, 그것을 나눠 가지려는 나는 힘 있는 그에게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부와 가난은 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상대방보다 능력이 있거나, 여유가 있거나, 보다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면 그도 부인 것이다. 때론 어느 순간 상대방이 약자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교만하게 내게 있는 능력이나 상황 등 그 풍요로움을 이용하여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했다면 나 역시 앞서 언급한 폭력의 구조를 따르는 것이다. 만일 배우지 못한 사람이 관공서를 찾아 민원을 청하는데, 자신의 업무상 권한을 가지고 상황이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에게 마치 그 권한이 자신의 힘인 양 교만하게 행사했다면 그것도 부에서 오는 폭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지금 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가난하였고, 함께 따랐던 제자들도 부자와는 거리가 있었다. 힘과 권력 앞에서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가난을 택하신 것은 바로 겸손의 길을 택하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낮은 자가 되는 것이 참으로 자신을 드높이는 것이라는 진리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다.

가난을 지향한다는 것은 곧 겸손을 지향하는 것이다.